슈퍼비랑

 

 

 

 

 

 

 

'달콤한 나의도시' 의 저자 정이현 작가의 소설집이다. 9년만에 묶어낸 세번째 소설집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정이현 작가는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 라고 했다. 그녀가 소설집 맨 뒤에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라고 남겨놓은 문장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살고있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가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설명해 주는것 같았다.

멀리서 보면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을것 같은 신기한 일들이 한발짝 다가서면 누구에게나 일어날법한 흔해빠진 현실에서 제각기 다르게, 또 같게 현실에 대처하며 쓸쓸함과 위안을 주고 받으면서 함께 살아간다.

아버지의 옛 애인과의 우정, 미숙한 사춘기 딸아이의 더 미숙하게 태어날 뼈가지만 앙상한 아기..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공허함이 가운데 늘 존재 해야만 하는 사이.

늘 가까워 항상 곁에 있었지만 어느 한순간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저 멀리 있는 인간관계들.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낯선것이 아니듯, 오래된것은 낡아지고 퇴화되면서 같이 녹아내리리수도, 더는 회생시킬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질수도 있고 새로운것은 언젠가 다시 낡아져 가듯 어떻게 길들여 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의 친구가 창졸간에 당한 불행을 눈으로 직접 확인 사살하는 증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p.45

"유리 파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스칠 거라고요." p52

"경은 다음 날 약속시간인 9시보다 10여 분 늦게 원장실 앞에 도착했다. 변호사 출신이지만 지금은 육아를 위해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여자가 원장에게 조목조목 따지는 중이었다. 유기농 식품만 제공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원장은 유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공식적으로는 당연히 유기농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머님들이 지금 당장 주방에 내려가 확인하셔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p224

 

 

 

이 이야기들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이웃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겪게될 이야기 라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들을 했어야 했을까?

나는 어떻게 이 흔하고도 복잡한 일들을 어떻게 흘려보내고 있었을까?

무심코 아무렇지 않은 그저 옆집에 반상회에 갔다가 들었음직한 일들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어느새 한구석에 작게 한숨을 내쉬게 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단 7편 뿐이지만 우리가 살고있는 현시대의 많은 일들이 7편 안에 녹아 있는것 같다. 다만, 우리가 살고있다는 이 유리조각 같은 순간들을 조금만 더 받아들여 준다면, 조금만 더 가깝게 어루만져 준다면 상냥한 폭력이 아니라 상냥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아니면 우린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상냥하기만 했던 시대를 지나쳐 오고 만걸까?